재난 현장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타인을 구한다는 직업적 특수성만으로도 귀감이 되고,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현장에서 받는 소방관의 대우는 사뭇 다르다.
중기이코노미와 만난 119레오(REO) 이승우 대표는 사회적으로 저평가된 직업 중 하나인 소방관이 안고 있는 문제를 알리는 것이 기업의 주요 가치라고 설명했다. 119레오는 폐 방화복을 업사이클링해 패션제품으로 만들어 그 수익금을 다시 소방관에게 돌려주고 있고, 각종 전시와 브랜드 협업 등을 통해 소방관의 현실을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故김범석 소방관의 뜻 기리다 창업으로 이어져
119레오는 2016년도에 ‘사회 문제를 해결해보자’라는 모토를 가진 ‘인액터스’라는 대학 동아리로부터 출발했다. 이승우 대표는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던 소방관에 대한 솔루션을 찾아보자는 생각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암 투병 소방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고 한다.
당시 이 대표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은 지원이었다. 불을 끄는 직업을 가진 소방관이 연기에 노출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고, 이들이 연기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도 알 텐데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에 걸린 소방관들은 스스로 암에 걸린 사유를 의학적으로 입증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업무와 병의 인과관계를 스스로 입증하면 인정해주겠다는 건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이 문제는, 세상 밖으로 꺼내 공론화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대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6년 당시 국내에 121명의 암 투병 소방관 중 2명만이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121명도 소송한 사람의 숫자다. 그렇다면 소송을 하지도 못한 소방관까지 합하면 암에 걸린 소방관 수는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중에서도 故김범석 소방관은 그를 창업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사실 이승우 대표는 1년만 활동을 한 후, 원래 전공이었던 건축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그의 스토리가 그를 창업으로 이끈 셈이다.
“故김범석 소방관의 스토리로 펀딩을 열었고, 당연히 그 유가족에게 기부금을 전달했어야 했지만, 故김범석 소방관의 아버지께서 받지 않겠다고 했어요. 119레오 덕분에 암 투병 소방관과 故김범석 소방관에 대해 알려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서요. 소송조차 하지 못하는 소방관들에게 지원해서 우리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대표는 故김범석 소방관 부친의 의견에 따라 2017년 8월에 첫 기부금 전달식을 했다. 하지만, 이듬해 1월에 기부금을 받았던 소방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에서 맞았던 첫 죽음이었다.
“자책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괜히 우리가 기부금으로 신경 쓰게 해서 돌아가신 게 아니냐고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故김범석 소방관의 아버지께서 ‘너희 덕분에 기억될 수 있어 고맙다’라는 말씀을 해주셔서 힘이 됐어요. 그 얘기를 듣고 우리들의 역할은 기부금보다도 이분들이 세상에 기억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119레오는 ‘기억’에 초점을 맞춰 전시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첫 전시의 대주제는 ‘현장의 기억, 방화복’이었고, 소제목이 ‘영원한 소방관, 김범석’이었다. 이후 성수, 을지로 등에서 공간을 빌려 영상전시를 비롯해 인터뷰를 담은 전시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방화복으로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드는 것도 같은 이유다. 소방관을 지켜줬던 방화복으로 제품을 만들게 되면, 소방관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직관적으로 표현될 수 있지 않겠냐는 마음에서다. 회사명도 서로가 서로를 구하자라는 뜻으로 ‘Rescue Each Other’의 첫 글자를 따서 119레오라 지었다. 여기에 기억하다라는 뜻으로 ‘리멤버’를 핵심 가치로 더해 ‘생명을 구한 가치가 담겨 있는 방화복’을 기억하고자 했다.
이렇게 판매한 금액은 암 투병 소방관을 위해 기부한다. 동아리 시절에는 가내수공업처럼 직접 폐 방화복을 수거해와 뜯고, 세탁까지 해가며 인건비도 없이 공장 제작비를 제외한 모든 금액을 기부했다. 이후 정식으로 사업체를 꾸리고 나서는 영업이익의 50% 정도를 꾸준히 기부하고 있다.
백화점 팝업과 브랜드 협업 등으로 브랜드 알려
119레오의 시작은 ‘암 투병 소방관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자’라는 것이었고, 지금도 소방관의 권리 보장과 이를 알리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기업의 가치가 강력한 마케팅이 되기도 하지만, 제품을 알리는 활동도 중요하다. 119레오는 이 두 가지를 현명하게 잘 버무리며 활동하고 있다.
우선 백화점 팝업과 브랜드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브랜드를 시의적절하게 알리고 있다. 백화점 팝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코로나19가 시발점이 됐다. 코로나로 인해 백화점에 있던 기성 브랜드들이 많이 빠졌고, 이로 인해 119레오와 같은 작은 브랜드에도 기회가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백화점 팝업을 진행하면서 백화점이 일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퀄리티 체크 방식을 많이 배웠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업사이클링 소재에 대한 랜덤 체크를 계속해왔거든요. 세탁 이후에 코티티(KOTITI)에 보내서 유해성 검사 등도 진행하고 해외의 논문을 찾아보기도 했고요. 논문에서도 방화복은 일회용이 아니기 때문에 세탁하면 유해 물질이 대부분 없어지게끔 설계된다고 돼 있습니다. 우리는 최소 2회 세탁을 하기 때문에 유해물질 제거 문제에는 자신도 있었고요. 하지만, 백화점에 들어가려면 시험성적서가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시험성적서라는 것을 받을 수 있구나’라고 처음 알았습니다. 즉시 시험성적을 보냈는데 통과하는 걸 보면서 우리 자신도 ‘안전’에 대한 것을 입증하게 됐죠.”
지금까지 119레오가 진행한 백화점 팝업만 50곳이 넘는다. ▲더현대서울 ▲롯데월드몰 ▲신세계 본점과 강남점 ▲광주 신세계▲롯데 부산 본점 ▲울산 롯데 ▲전주 롯데 등 수도권과 지방을 아울렀다.
브랜드 협업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협업했던 브랜드만도 50개가 넘는다. 지난해 초에는 신라면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했다. 신라면에서 소방관 후원을 진행하면서 대국민 이벤트를 기획했고, 119레오에서 소방호스로 만든 카드지갑을 이벤트용으로 커스터마이징했다. 최근에는 석촌호수 위를 떠다녔던 러버덕을 친환경 굿즈로 만들었다. 전시됐던 러버덕을 119레오에서 수거해 세탁, 분해, 제작, 디자인 과정을 거쳐 재가공했다.
총알도 못 뚫는 소재로 인기…PTSD 치료 지원
119레오가 만들고 있는 제품은 50~60여 종이다. 그중 대표 제품은 ‘714 슬링백’이다. 2019년도에 출시된 제품인데도 여전히 상위권에 랭크돼 있다. 소비자에게 반응이 좋은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다. 동일 카테고리 안에서 비교했을 때 수납이 가장 많다며 좋아하는 소비자가 꽤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미니 크로스백이 인기다. 해피빈 펀딩을 진행하고 있는데 오픈 40시간 만에 1000만원을 넘겼을 정도다.
119레오가 20~30대로부터 한결같은 충성도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제품의 품질 때문이다. 방화복의 주요 소재는 ‘아라미드(Aramid)’라는 섬유다. 500°C의 불 속에서도 타거나 녹지 않는 내열성을 지녔고, 총알도 뚫지 못하는 강도와 아무리 힘을 가해도 늘어나지 않는 뛰어난 인장강도가 장점이다. 철과 비교 시 동일 면적에서 5배 정도 강하다. 그래서 방탄복, 우주복, 5G 광케이블 피복 등 특수하고 튼튼함이 요구되는 제품에 주로 쓰인다.
현재 자사몰과 노량진에 위치한 자체 오프라인숍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119레오의 매출은 매년 성장세를 보인다. 재작년에 9억원을 달성했고, 지난해에는 역시 이보다 더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이 대표는 말했다.
“항상 매출과 영업이익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영업이익이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빠른 성장이 더 중요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초기에 우리가 내걸었던 기부라는 약속을 못 지킬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이 두 가지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 대표의 장기 목표는 119레오의 가치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앞서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소방관의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다.
“지난해 공상추정법이 통과됨으로써 암이나 희귀질환에 걸린 소방관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습니다. 올해부터는 소방관의 PTSD 치료를 지원하기 위해 힘쓸 예정입니다. 일반적으로 PTSD를 겪은 사람은 같은 환경에 노출될 일이 없지만, 소방관은 계속 같은 상황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접근방식 자체가 달라야 하거든요. 마침 한림화상재단과 뜻이 맞아 함께 PTSD에 대해 지원하려고 합니다. 화상 환자도 화상을 계속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 사이에 유사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화상 환자에 쓰였던 치료방식을 개량해 소방관에게 적용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그들의 아픔을 경감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중기이코노미 김범규 기자
<저작권자 ⓒ 중기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