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반도체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메모리 시장에 치중된 반면 보다 규모가 큰 비메모리 시장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하다. 비메모리 시장을 키우고 팹리스 생태계를 빠르게 강화하기 위해 M&A 전략을 도입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이 최근 펴낸 ‘K-팹리스 일병 구하기’ 보고서를 보면, 올해 들어 9월까지 한국 반도체 수출액은 1197억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2024년에는 AI의 영향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부가제품 수요가 급증하며 수출이 1년새 40% 넘게 급증했는데, 올해에도 지난해 수출액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수출 실적을 메모리와 비메모리로 구분해서 보면, 2025년 1~9월 수출액 중 메모리 비중은 66%로 나타난다. 과거 5년 평균 비중인 60%보다 6%p 늘어나 메모리 편중이 심화됐다.
메모리 반도체는 대량생산 능력을 갖춘 종합반도체 업체가 주도하는 시장이다. 하지만 비메모리는 수요처에 따라 요구되는 품목과 성능이 각양각색인 만큼 공정별로 분업화, 특화된 기업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 ‘팹리스’가 비메모리 설계를 마치면 대형 생산시설을 보유한 파운드리 업체가 이를 위탁 받아 생산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글로벌 팹리스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약 1%대에 불과하다. 엔비디아·퀄컴·브로드컴 등 시장을 압도하고 있는 미국 업체들은 물론, 미디어텍과 리얼텍 등 대만 팹리스 업계와도 비교가 힘들 지경이다. 국내에서는 디스플레이용 시스템 반도체업체 LX세미콘 외에는 글로벌 시장에서 유의미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국내 업체가 없다.
보고서는 “메모리도, 파운드리도 중요하지만 특히 취약한 팹리스 역량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2024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비메모리 비중(매출액 기준)은 76%로 메모리 시장의 3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팹리스 스타트업들이 AI 반도체 등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국제적 입지는 전반적으로 미약하며 시장에서 확실한 입지를 구축한 선도기업은 나오지 않고 있다.
파운드리와 연계 확대, M&A 전략 등 고려해야

보고서는 팹리스 스타트업을 키우고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국내 투자환경 활성화가 절실하다”고 봤다. 정책금융 확대와 함께 민간 투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환경 조성도 필요하다고 했다.
더불어, 반도체 업계 전반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지만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팹리스 스타트업에 실질적 도움이 제공될 수 있도록 핀셋형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정부는 이미 연간 벤처투자 규모를 40조원으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지난해 국내 벤처투자 규모 약 12조원의 3배를 넘어서는 수치다. 또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해 향후 5년간 10대 첨단전략산업에 집중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산업별로 보면 AI에 30조원, 반도체에 20.9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보고서는 “국민성장펀드가 유망한 팹리스 벤처·스타트업을 장기간 지원해 K-NVIDIA를 발굴하는 마중물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고 했다.
팹리스의 파운드리 연계, 특히 국내 파운드리 연계가 확대돼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 불허 통상 리스크가 커지는 가운데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국내 업체 간 협력은 더욱 중요해졌다는 이유에서다.
대만의 TSMC는 창업 초기에 공공 파운드리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TSMC의 주요 생산시설이 들어선 과학단지에 수많은 반도체 기업들이 모여들면서 대만의 실리콘밸리가 조성됐다. 보고서는 “한국에서도 설계 기술력은 있으나 생산 설비가 없는 팹리스들의 파운드리 접근성을 높이고 테스트베드 역할을 수행하는 공공 파운드리를 도입해 국내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성장을 모색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국가 AI 컴퓨팅센터 사업 등 정부 기획 프로젝트와 국책사업에 국내 팹리스가 개발한 반도체를 시범 도입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보고서는 이같은 세 가지 성장 방안과 함께 “팹리스 생태계를 빠르게 강화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M&A 전략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했다. 글로벌 주요 기업들은 핵심 기술 확보와 빠른 시장 선점을 위해 업체 간 합종연횡을 진행 중이다. 보고서는 “국내 업체들도 자체 설계 역량을 키우는 것과 더불어 더 나은 기술력을 가진 국내 또는 해외 기업을 인수함으로써 내실을 다지고(기술력 확보), 외연을 확장하는 (규모의 경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면서, “거래 과정의 규제 완화와 적절한 정책금융 및 세제 지원이 수반된다면 원활한 팹리스 M&A를 유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중기이코노미 이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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